반바지는 예의가 없다

ⓒ Pinterest


국민학생이었을 때 일이다.

어휴… 봄에 무슨 비가 이리 징하게 오는겨!

엄마가 빨래를 걷으면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푸념을 시작했다.

그날은 입학식 다음 주 월요일이었는데,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바지를 입고 등교한 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당시에 동네 어른들 대부분은 반바지를 싫어하셨다.

반바지는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반바지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 때나 입는 옷이다.

왜 반바지를 입는 게 예의가 아닌지 물어봐도 정확한 이유는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만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반바지를 싫어하셨다.

주말이면 가끔 동네 고등학생 형이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형을 보실 때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화를 내셨다.

저거 봐라! 저러고 다니면 다 부모 욕 먹이면서 다니는 거야!

바지는 반 토박이다 잘라먹고, 저 쓰래빠는 또…… 쯧쯧

할아버지가 왜 나에게 화를 내는지도 몰랐고 왜 부모님이 욕을 먹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역정을 내시는 할아버지가 무서웠을 뿐이었다.

넌 그러면 안 된다. 알겠냐?

알겠다고 대답하고 재빨리 엄마를 찾아 자리를 피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 우리 집에서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간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학교를 간다고?

그건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학교 가는 날만이 아니었다.

반바지를 입고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 놀려 가려다가 할아버지의 노여움을 산 적이 있다.

일요일이라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선생님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정신머리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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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새벽부터 갑자기 쏟아진 많은 비 때문에 이상한 날이라고 하는 건 아니다.

차가 많이 막힐 거라며 평소보다 일찍 출근 준비를 하시는 아빠,

아침 뉴스를 보시며 다 문제라고 쯧쯧 혀를 차시는 할아버지,

옥상과 부엌을 오가며 정신없이 뛰어나다는 엄마.

정말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어제 저녁 옥상에 널어놓은 옷들은 다 젖어서 방에 널브러져 있었고 부엌은 물이 차서 발가락이 다 잠길 정도였다.

여보 누룽지라도 먹고 가요.

니들은 언제까지 잘 거야!


빨아서 널어놓은 빨래가 다 젖어서인지, 아니면 간밤에 막혀버린 하수구가 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평소 아침보다 엄마가 더 예민한 날이었고 사소한 일로도 화가 많은 날이었다.

동생과 나도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끼고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누룽지를 입에 넣었다.

누룽지를 다 먹고 씻으려고 하자 엄마는 오늘은 씻지 말고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평소에는 안 씻는다고 뭐라고 했던 엄마였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에 내가 무슨 잘못한 건 아닌지 불안해하면서 엄마 눈치를 살폈다.

잠시 후 냉랭한 분위기의 엄마가 학교에 입고 갈 옷을 꺼내주셨다.

난 베이지색 반바지였고 동생은 하늘색 치마였던 것 같다. 원피스였는지도 모르겠다.

반바지를 본 순간 매우 당황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 반바지를 입고 가면 안 되는데… 예의가 아닌데… 할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근데 할아버지는 뉴스 때문인지 반바지에 관심도 없으셨다.

뉴스에서 기자가 한마디 할 때마다 세금을 어디다 쓰는 거냐고 소리치셨다.

할아버지에게 반바지를 입고 학교를 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빨리 옷을 입고 학교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할아버지가 따라 나와서 나를 보며 화를 낼까 무서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날 엄마는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예의를 저버렸다.

혹시나 동네 어른들에게 반바지를 입어서 혼날까 봐 우산을 깊숙이 내리고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걸어갔다.

동네 어른들이 반바지를 입은 나를 보고 할아버지에게 말할까 봐 걱정도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학교 가는 길에 친구들과 만나서 같이 물장난도 하고 웃고 떠들다 보니 두려움은 이내 사라졌다.

무엇보다 반바지를 입은 친구들이 생기면서 용기가 생겨났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어느새 비는 그쳤고 맑은 하늘에 햇살이 눈부셨다.

교문 앞에는 친구들을 데리러 온 아줌마들이 많았다.

우리 엄마는 이모 식당에서 일하느라 오지 못한다.

그래서 친구들이 부럽고 또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가 일 끝나고 집에 올 때 식당에서 떡볶이를 가져오니까 괜찮다.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영우도 옆에 있어서 괜찮다.

영우 부모님도 공장에서 일하셔서 오지 못한다고 했다.

골목길을 나와서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영우는 내 옆이 아니라 내 뒤에 날 보고 있었다.

내가 왜 안 가고 가만히 서서 뭐 하고 있냐고 묻자, 웃으면서 먼저 가라고 말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별생각 없이 대문으로 쪽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지켜보던 영우는 신기한 것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야! 너 반바지 입으니까 짝 궁둥이네!

하하하 오른쪽 엉덩이가 더 커!

갑작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도 모르는 나의 치부를 들켜버린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상한 상태가 되었다.

영우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등교할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쳐다보면서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할아버지가 학교에 잘 다녀왔냐고 물어보셨지만 난 인사도 없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반바지를 벗어버리고 서랍에서 긴 바지로 갈아입었다.

할아버지의 버르장머리…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반바지는 예의가 없다.

반바지가 왜 예의가 없다고 하는지 그제야 깨닫게 됐다.

난 그날 이후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반바지를 거의 입지 않았다.

한 여름에도 긴 바지만 고집하는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멋 부리다가 쪄 죽겠다고 놀려댄다.

그럴 때마다 난 말한다.

반바지는 예의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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