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는 없고 편의점은 있다


ⓒ pinterest

우리 동네에는 정말 오래된 슈퍼가 있다.

정확히는 상회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한자리에서 지켜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소 40년 이상은 된 것 같다.

식당도 아닌 슈퍼가 한 동네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장사를 이어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참 대단한 것 같다.

그곳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건물 외관부터 밖에 창고까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지나갈 때마다 어르신들이 바둑도 두고 술도 마시는 모습은 마치 사랑방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카페 같이 장소만 제공하는 곳은 아니다.

주변에서 가장 커서 웬만해서는 없는 게 없다.

잠자리채, 뽑기 장난감부터 문구류, 쫀드기 같은 불량식품부터 종합선물과자세트까지 다 있다.

그러고 보니 정체성이 좀 애매한 것 같기도 하다.

혹시라도 없는 물건을 찾으면 사장님은 가슴 주머니에서 오래된 밤색 수첩을 꺼내어 큼지막하게 적어놓는다.

그리고 준비해 놓을 테니 다음에 가져가라고 한다.

미안한 마음에 괜찮다고 하고 돌아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보면 그 물건이 좁은 진열대 사이에 놓여있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그럼 사장님은 그때를 기억하고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한다.

그럴 때는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죄스런 마음이 든다.

그래서 계획에 없는 지출이 발생하기도 한다.

좋은 친구는 사장님이 아무리 친절해도 쉽지 않은 일이라며 놀라워하고,

못된 친구는 사장님의 고도의 영업 전략에 네가 당하는 거라고 놀리듯 말한다.

그곳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받은 느낌을 말하자면, 사장님은 장사가 아니라 마치 이 동네 주민들을 위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항상 수첩을 들고 다니시면서 메모하는 모습, 슈퍼 앞에 의자가 불편하다는 어떤 할아버지의 말에 새로운 의자로 교체한 것, 갈 때마다 필요한 거 있는지 물어보시는 모습들.

그래서 이곳은 나에게 슈퍼라기보다는 만화 속 도라에몽 주머니 같았다.

늘 그렇게 한결같이 터줏대감 같았던 슈퍼에 어느 날 폐업 정리 현수막이 걸렸다.

난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장님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건강이 안 좋으신가? 혹시 이사 가시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걱정도 되고 궁금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좋은 모습으로 다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공사기간이 한 달 정도로 적혀있었다.

‘다시 인사를 한다고 하셨으니, 이사 가는 건 아닐 것 같고, 인테리어를 새로 하시는 건가?’

슈퍼는 품목도 많아서 재고도 신경 쓸게 많으니까 업종을 변경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위치상으로는 카페나 식당이 괜찮을 것 같다.

사랑방 역할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난 디저트 카페가 들어오면 좋을 것 같다. 분식집도 나쁘지 않고.

혹시 전 세계에 맥도널드보다 많다는 치킨이려나?

사실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그곳에 없는 물건 하나 찾으면서 넌지시 물어보면 되는 건데, 그럴 수 없었다.

난 2년 전쯤, 길 건너편에 GS25 편의점이 생기고 나서 이곳에 발길을 끊었다.

그것이 왠지 모르게 배신을 한 것 것 같았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불편한 감정이 크게 남아있다.

음, 공사가 끝나보면 알겠지. 지금 알면 재미없고, 나중에 오픈하고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한 달여 간의 공사가 진행됐다.

자주 다니던 길은 아니라서 가끔 지나갈 때마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장은 합판으로 둘러싸고는 공사를 하는 바람에 무엇이 들어오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역시나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그렇게 몇 번을 지나쳤다.

이미 자기 합리화도 충분히 했고 말이다.

그리고 공사기간이 끝나고 며칠 뒤, 지나가다가 그 자리에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 pinterest

내가 너무 잘 아는 편의점이었다.

그리고 그 편의점 카운터에는 사장님이 서서 상품의 바코드를 하나씩 찍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듯 안경을 계속 고쳐 쓰시며 바코드를 찍는 모습이 꽤 안쓰러워 보였다.

난 가던 길을 멈추고 한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뭔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폐업 정리 90% 세일

사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현수막을 만들었을까?

직접 손으로 쓴 현수막을 걸어야만 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40년을 버텨온 슈퍼, 아니 상회를 정리하면서 좋은 모습으로 다시 인사를 드린다는 말의 의미가 편의점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많은 생각과 감정들로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 규모의 경제, 자본주의를 이길 수는 없지.

맞아, 요즘 사람들은 가격도 중요하지만 내외부 환경도 중요하니까!

어린 친구들은 편의점을 더 선호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야.

구매력이 있는 대상을 고려해야 해, 단골만으로는 유지하기 어려워.

난 사장님이 그럴 수밖 없는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멍하니 상회 자리를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이제 상회가 아닌 그 편의점은 갈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

왜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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